국내여행/전국 문화재 지도
익성군신도비및무석
원시시대 ·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부가 정보
- 지정일
- 1979-07-03
위치 · 길찾기
문화해설
익성군(益城君, 1566~1612)은 중종의 9남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아들인 손자 하원군(河原君) 정(鋥)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향령(享齡)이다.
1566년(명종 21)에 태어나 13세에 익성정(益城正)에 봉해지고, 임진왜란 당시 의주에 머물던 선조를 따라가 있다가 서울로 돌아와 1597년(선조 30) 익성군(益城君)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612년(광해군 4)에 무고 사건에 휘말려 거제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신도비(神道碑)는 1634년(인조 21)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조익(趙翼)이 짓고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으며, 머릿글인 '익성군신도비명(益城君神道碑銘)'이라는 두전(頭篆, 비석의 머리 부분에 돌려가며 쓴 전자)은 여이징(呂爾徵)이 전서체로 썼다.
신도비는 중국식의 이수(螭首, 용 모양의 머릿돌)에서 우리 고유 형식인 가첨석(加檐石, 지붕 모양의 머릿돌)으로 바뀌어 가는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높은 농대석(籠臺石)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碑身)과 머릿돌을 한 재료로 제작하였다.
높이는 320㎝ 정도이며, 머릿돌 앞면에는 용을 반쯤 드러낸 형상의 반용(蟠龍,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이 조각되었고, 옆면과 뒷면에는 구름무니가 양각되어 있다. 받침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대신 네모난 모양의 농대석(籠臺石)을 사용하였다.
묘역 양쪽에는 한 쌍의 무인석(武人石)이 서 있는데, 모두 하나의 돌로 조각된 상으로,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양손을 모아 칼을 잡고 허리에는 칼집을 찬 모습이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중기 무인의 복식과 석조 조각기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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